영화의 역사

1895년 영화가 탄생한 이래로 영화는 예술로서 또는 산업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며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았다. ‘영화’는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혁신된 기술의 역사를 거치면서 영화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했다. 또한 영화의 역사는 중요한 대중문화 예술의 역사와도 항상 함께했다. 영화는 아방가르드, 표현주의, 사실주의, 모더니즘, 포스터모더니즘 등과 함께 쉬지 않고 움직이며 대중문화 예술의 발전과 변화를 이끌었다.

극영화 형식의 시초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1861∼1938)가 극영화의 기초를 다지기는 했지만, 이것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을 돕고 있던 에드윈 포터(Edwin S. Poter)였다. 그는 1903년 <대열차 강도>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그 당시 영화의 주류를 이루던 무대연극의 단순 촬영에서 벗어나 여러 장면을 나눠 촬영하고 편집하여 완성된 권선징악의 극영화였다. 이 작품에서 포터는 이동 촬영을 시도하는 등 서부 영화의 모체가 되는 촬영 기법을 개발하여 극영화 형식을 창안하는 업적을 남겼다.

<대열차 강도>를 계기로 미국에서는 흥미 위주의 서부극이 지속 제작되었으나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작품을 저속한 속물이라고 혹평하면서 1907년에 예술가들이 ‘필름다르’라는 영화사를 창립한다. 이 회사는 <노트르담의 꼽추>, <춘희>, <레 미제라블> 등 수준 높은 문학을 영화화하여 예술로서 영화를 주장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관객에게 외면당했다. 그러나 이 운동으로 영화가 예술성을 지녀야 한다는 정신은 세계 영화인들에게 충분히 인식되었다.

본격적으로 극영화 형식을 완성한 감독은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였다. 그는 국가의 탄생(1915)을 통해 다양한 촬영, 편집 테크닉을 선보이며 극영화 형식을 규격화했다. 그리피스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면서 영화에 매료되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으며, 에디슨영화사에서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피스는 롱숏, 미디엄숏, 클로즈업 등 다양한 숏의 변화를 통해 극적 구성을 만들었으며 연속 편집으로 극영화 형식을 발전시켰다. <국가의 탄생>의 흥행 성공 이후 활발해진 영화제작은 기후가 맑고 건조하여 야외촬영에 알맞은 데다 필름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데에도 적합한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서 활성화하고 발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영화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리피스, 세실 비 데밀(Cecil B. DeMille),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등에 힘입어 세계 영화시장을 석권하는 실적을 올리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1915년을 전후하여 그리피스 등이 주도한 영화제작의 비약적인 발전은 영화를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화 예술로 승화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무성영화 시대

제1차 세계대전 중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미국 영화는 1920년에 들어서면서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할리우드는 영화인들은 물론 영화 팬들로 북적거렸으며, 영화관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영화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갖게 되자 영화업자 자신들이 스스로 검열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영화는 발전했으며,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할리우드의 규모는 더욱더 커지고 제작 편수도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비현실적인 분장과 세트와 광란의 강렬한 전율적 표현으로 살인을 계속하는 미친 사람의 망상을 그려 불멸의 명화로 화제가 된 표현주의 영화인 <칼리가리 박사>를 비롯하여 <고렘>, <아침부터 밤까지>, <죽음의 계곡> 등 표현주의 영화가 제작되어 독일 영화가 질적으로 발전되면서 세계 속에 독일 영화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한때 부진했던 프랑스 영화는 아벨 강스(Abel Gance)의 <전쟁과 평화>, <철로의 백장미> 등을 통해 프랑스 영화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프랑스의 영화예술 운동은 영화 작가들의 영화 정신을 기반으로 한 아방가르드, 즉 전위영화운동 등을 통해 활발히 일어났다. 이 아방가르드운동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예술 운동으로 새로운 정신을 추구했는데, 영화는 줄거리에 의지하지 않고 이미지의 주체성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운동은 상업 영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지만 지나치게 실험적인 예술 영화로 관중의 외면을 받아 퇴색해 갔다.

기록 영화 작가인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는 1922년에 <북극의 나누크>를 만들어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는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과 같이 다큐멘터리 장르와 전통을 만들었다. 1920년대 미국 영화계는 상업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외국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계는 전쟁으로 피폐된 독일 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작품들 및 스웨덴의 신비주의적인 경향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유럽에서 활약하던 작가들이 이 시기에 미국으로 이주해 무성영화 제작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890년대에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과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1861∼1938)에 의해 사운드 영화가 실험된 후부터 꾸준히 유성영화 연구가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1927년 뉴욕의 워너극장에서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흥행에 대성공을 거둔 워너브라더스는 파산 직전 상황에서 기사회생했다. 유성영화 <재즈 싱어>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자 각 영화사들은 유성영화의 제작을 서둘렀으며,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등도 다투어 유성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유성영화의 탄생

1927년, 유성영화의 시초인 <재즈싱어>는 영화 전체가 유성이 아니었고 일부분만 녹음이 이루어졌었다. 그 후 제작된 <뉴욕의 등불>이 최초로 전편을 완전 녹음한 유성영화였다. 영화학자들은 유성영화가 영상 표현의 순수성을 잃는다는 이유로 반대도 했지만, 대중은 유성영화에 열광했다. 대사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연기자는 버림을 받는 등 부작용이 잇따랐다. 뜻있는 일부 연출가들은 유성영화가 공개된 후에도 계속하여 한동안 무성영화를 제작하는 등 끝까지 저항해 보았으나 대세에는 역부족이었다. 거부하는 데 한계가 있어 무성영화만이 예술이라고 드높이 외치던 영화학자들도 마침내는 유성영화의 흐름을 인정하고 말았다. 무성영화 시대가 순수 시각 표현의 ‘카메라의 시대’라고 한다면, 유성영화 시대는 ‘드라마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성영화 시대는 ‘사운드’ 덕분에 관객이 희망하는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스토리는 자연히 극적 구성을 기반으로 한다. 시각적인 문제보다는 주제와 인간의 극적 상황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성영화 시대의 탄생을 통해 영화 안에서 사운드의 중요성은 시각적 표현과 거의 동등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사실적이고 감동적인 영화들을 선보여 세계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감독의 <무방비 도시>와 <전진>,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자전거 도둑>과 <구두닦이>, 루이지 잠파(Luigi Zampa)의 <평화에 산다> 등을 통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제시했다.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은 카메라와 현실 세계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의 영화가 계산된 극적 스토리를 전달해 왔다면 네오리얼리즘은 ‘영상’의 리얼리티에서 출발했다. 카메라가 파괴된 로마의 비참한 현실 생활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그대로 보여 줄 때, 작가가 느낀 현실에 대한 정치적, 사상적 입장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작가들은 여러 대상을 보면서 그 대상들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단절 없는 현실의 시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최대한 사실처럼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연출이 네오리얼리즘의 스타일이었다. 사실처럼 보이기 위한 롱테이크, 한 화면 속에 전경, 중경, 후경의 여러 대상물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딥포커스를 활용하였고, 인위적인 스튜디오 세트 촬영을 거부하고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했다. 또한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여 사실성을 강조한 것 등이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이었다. 화면 구성면에서 보자면, 뉴스 영화 또는 기록 영화적인 에피소드 전개 등 스토리 중심의 영화제작에서 탈피한 새로운 표현 방식이 네오리얼리즘이었다.

프랑스의 ‘누벨바그’

1950년대 말에 프랑스에서는 젊은 세대가 중심이 되어 문학, 연극, 미술 등 문화 예술 각 분야에서 새로운 문화 예술 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예술 사조의 흐름을 ‘누벨바그’라고 총칭했는데, 특히 영화예술 운동에 집중되었다. 즉, 누벨바그는 1950년대 말 20대에서 30대 젊은 작가들의 영화예술 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누벨바그 작가들은 그 당시까지의 전통적인 영화 양식을 파괴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의 특징은 스토리나 드라마보다는 현실과 카메라가 직접 만난 것을 중요시하면서 다양한 영상의 표현 방법으로 영화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카메라를 통한 현실과의 만남에서 의식의 내적 변화와 현실의 다면적 모습을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잘 다듬어진 연출에 의한 카메라 위치와 각도로 찍은 장면보다도 몰래 찍은 거리 일화들이 더 감동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값비싼 스튜디오나 방대한 조명 시설 등을 거부하고 가벼운 휴대용 카메라와 고감도 필름을 사용하는 등 제작비를 극도로 줄이고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누벨바그는 새롭고 혁신적인 생각을 통해 새로운 영화 언어를 창출하였다. 줄거리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고 현실과 카메라의 직접적인 접촉을 중시하여 예컨대 즉흥 연출, 장면의 비약적 전개, 완결되지 않은 스토리, 영상의 감각적 표현 등에 의하여 종래의 영화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루이 말(Louis Malle)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7)와 <연인들>(1958),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의 <사촌들>(1959)과 <이중의 열쇠>(1960),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24시간의 정사>(1959),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의 <어른들은 알아주지 않는다>(1959)와 <400번의 구타>(1959), 장 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1960) 등이 대표 작품이다.

영화 비평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중심의 비평가 동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시네마테크에서 예술영화 작품을 공부하며 주관적인 영화 만들기에 집중한 특징이 있었고 짧은 활동이지만 세계 영화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뉴아메리칸 시네마

뉴아메리칸 시네마는 1960년대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또는 실험 영화 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다. 1960년대 라이오넬 로고신(Lionel Rogosin), 피터 보그다노비치(Peter Bogdanovich),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셜리 클라크(Shirley Clarke), 로버트 프랑크(Robert Frank)를 비롯한 독립 영화감독, 제작자들은 ‘아메리칸 뉴시네마 그룹’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그들의 성명서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일종의 도전장이었다. “우리는 허위로 가득하고 세련되며 호화로운 영화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영화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뉴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은 영화가 관객에게 자극과 문제의식을 주기를 바란다. 이에 청소년 비행 문제, 마약 문제, 시민의 권리투쟁, 경찰의 잔학상과 편협성, 빈민가를 영화의 소재로 삼았고 미국 사회의 혼란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급진적인 ‘아메리칸 뉴시네마 그룹’의 정신은 아서 펜(Arthur Penn), 마이크 니컬스(Mike Nichols),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리처드 플레이셔(Richard Fleischer),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등에 영향을 준다. 이 감독들은 사회문제에 단순한 결론을 제시하는 주류 할리우드 영화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을 주제로 한 영화 만들기에 동참하였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붐을 알리는 효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이지 라이더>다. 아서 펜 감독(Arthur Penn)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는 공황기 두 남녀의 범죄 행각을 통해 타락한 미국 사회를 고발한 화제작이다.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 감독의 <이지 라이더>(1969)는 마약 판 돈으로 국토를 횡단하는 히피를 통해 미국 사회의 불안과 허무를 보여 준다.

두 작품은 흥행과 비평가 찬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두 편의 영화에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인공은 주로 주변 계층이나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 모두로부터 소외되어 구시대적 가치와 새로운 것의 불확실성을 모두 거부하는 복잡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의 <그들은 말을 쏘았다>(1969), 샘 페킨파(Sam Peckinpah)의 <와일드 번치>(1969), 로버트 앨트먼(Robert Altman)의 <매쉬>(1970),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대추적>(1971)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다.

‘시네마베리테’, ‘다이렉트 시네마’

다큐멘터리 영화는 현실을 포착하는 데 사실적 구성과 그 구성을 지배하는 작가의 눈, 그리고 작가가 현실을 보는 방법과 테마를 취급하는 방식이 기본이었다. 따라서 기록된 사실을, 보는 방법과 테마의 조립에 의해 비로소 진실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런데 ‘시네마베리테’파들은, 첫째로 카메라의 눈을 믿고 또한 중요시하며, 사실의 추구에 의해 진실을 사실 속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이 계열의 대표적인 작가는 장 뤼쉬(Jean Rouch)와 크리스 마르케르(Chris Marker)인데, 뤼쉬는 원래 인류학자로 당초 16mm 카메라를 들고 아프리카 등 흑인들의 생활을 연구용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 연구용에서 차츰 도시 속 인간에게도 카메라를 맞추어 1960년에 만든 것이 <인간 피라미드>와 <한여름의 기록>이다.

이 작품들은 일상성 속에서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였다. 이들은 있는 사실에 어떤 ‘쇼크’를 주고 그 ‘쇼크’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상성 뒤에 숨겨 있는 사실의 참다운 그리고 소박한 모습을 발견하려 했다. 카메라를 쥐고 있는 작가가 예측할 수 없는 대상의 움직임을 어떻게 포착하며, 여기서 나타나는 즉흥적인 의식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시네마베리테는 영화 속 대상에 자유를 부여하고 그 대상의 움직임에 따라 즉흥성을 가급적 다양한 의식으로 포착하려고 시도하였다. 시네마베리테는 ‘다이렉트 시네마’나 ‘프리 시네마’로도 부르는데,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새로운 다큐멘터리 정신으로 확장되어 갔다.

영화사 요약

• 영화탄생(1895∼1905)
• 영화의 성장(1906∼1915)
• 무성영화 시대(1916∼1926)
• 유성영화 시대 도래(1927∼1935)
• 영화산업화 시대(1936∼1945)
• 네오리얼리즘 시대(1946∼1956)
• 누벨바그의 새로운 영화기(1957∼1966)
•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1967∼1975)
• 뉴저먼 시네마(1976∼1985)
• 포스트모던 영상 시대(1986∼1995)
• 디지털영화 시대(1995∼2008)
• 입체 영화와 뉴미디어 시대(2009∼)